문화이야기

[고려거란전쟁] 3차 여요전쟁, 귀주대첩 영웅 3인 강감찬 외 강민첨-김종현 장군 누구인가...영화같은 고려 기병의 소배압 추격전...현종 개경성 배수진 전략 펼친 이유

탐진강 2024. 1. 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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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위인전을 읽었다면 유치원생도 들어봤을 이름이 귀주대첩의 신화를 만든 강감찬입니다. 

강감찬은 고려 정종과 현종 기간 중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 중의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강감찬의 귀주대첩에는 강민첨과 김종현이라는 출중한 리더가 함께 했습니다. 

지금부터 귀주대첩에 대해 강감찬은 물론 강민첨과 김종현 등 주요 장군의 활약상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귀주대첩의 요약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 거란은 성종 12년 소손녕이 이끄는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고려는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 강동 6주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강동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현종 1년, 거란 성종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습니다.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습니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명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습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 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습니다.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당시 강감찬 장군, 강민첨 장군, 김종현 장군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강감찬 장군 이야기입니다.

거란은 두 차례에 걸친 고려 침략이 실패하였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거란은 고려에 두 가지 무리한 요구를 해왔는데, 고려 측에서 이를 거절하자 3차 침입에 나섰습니다. 


거란의 요구 중 첫 번째는 ‘현종이 거란의 조정에 들어와 예를 올릴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을 것’이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의 요구를 고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를 핑계 삼아 다시 고려를 침략할 속셈이었던 것이죠.

예상대로 고려는 현종이 병이 들어 거란에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며 거부하였고, 강동 6주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다


고려의 대응에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했고,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성을 쌓았어요.

그리고 거란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흥화진, 현재 평안북도 의주를 다시 포위했지만, 고려군은 거란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습니다.

이렇게 거란과 고려는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 소모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마침내 거란은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군사를 앞세워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소배압은 앞서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와 협상을 벌였던 소손녕의 형이에요. 

소배압의 군사는 거란의 최정예 부대로,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로 고려를 위협했습니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고려는 강감찬 장군에게 총지휘를 맡겼습니다.

강감찬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었지만, 무예 솜씨까지 훌륭해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고 이때 그의 나이는 무려 71세였습니다.


강감찬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한 후 소가죽을 가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하들은 재빠르게 마을로 내려가 소가죽을 구해 왔고, 강감찬은 소가죽을 꿰어 서로 이어 붙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강가 곳곳에 나무 말뚝을 박고 이어 붙인 소가죽으로 흥화진의 강물을 막았습니다.


고려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거란군이 건너기를 숨죽여 기다렸습니다. 

흥화진에 도착한 소배압 군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강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강은 곧 거란의 군사들로 가득 찼고,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가죽을 끊어 강력한 강물이 흐르도록 수공작전을 했습니다. 


소가죽을 찢자, 막혀 있던 강물이 쏟아지면서 순식간에 강물이 거란군을 덮쳤습니다.

거란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이용해 고려군은 화살 등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거란군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고, 승리한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고려군의 기습 작전이 끝나자, 거란의 소배압은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이후에도 부원수 강민첨 장군과 시랑 조원 장군의 공격으로 꽤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소배압은 개경 입성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소배압의 생각을 알아챈 강감찬은 미리 군사를 보내 개경을 단단히 지키도록 지시했습니다.

소배압이 빠른 속도로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왕 현종은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습니다.


2차 거란 공격에 전남 나주까지 피난을 떠났던 현종은 개경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운 것입니다.

거란군이 먹을 양식을 모조리 없애 궁지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개경은 고려의 도읍지로 고려로서는 꼭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도시였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무덤 릉도 개경에 있습니다. 

마침내 소배압의 군대가 개경에 도착했지만 거란군은 너무 먼 길을 달려온 탓에 기운이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주변 들판의 곡식은 이미 다 불 탄 후여서 먹을 것도 없었어요.


거란의 군사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점점 싸울 의지를 잃어갔습니다.

결국 소배압은 개경 침략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되돌아 갈 것이라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작전을 짰습니다.

마침내 거란군과 고려군은 옛 발해 땅인 귀주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거란군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강감찬 부대를 도와주기 위해 추가적으로 부대를 보냈습니다. 


개경에 내려갔던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거란군이 있는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의 화살이 바람을 타고 더욱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강감찬은 날씨를 철저히 예상하고 일부러 남쪽에 진을 친 것이었답니다.

반대로 거란군의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해 고려군에까지 닿지 않았습니다. 

당시 비 때문에 시야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고려군의 화살 폭격을 받은 거란군은 결국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후퇴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해 대승을 거둔 귀주 대첩

허겁지겁 달아나는 거란군을 놓치지 않고 강감찬은 추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소배압을 비롯해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이 ‘귀주 대첩’이고 거란으로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치욕스런 패배였답니다.


소배압이 패전하고 돌아오자 거란 성종은 진노하여 “네 낯가죽을 벗겨 죽여 버리겠다”며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소배압의 낯가죽이 실제로 벗겨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파직되어 귀양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듯 합니다.


강감찬이 개경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친히 영파역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화 8가지를 강감찬에게 꽂아 주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영파역은 흥의역으로 개칭되고 이곳의 역리는 지방관리와 같은 관대를 받았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거란은 결국 고려 침략을 포기했습니다.


고려 역시 거란에 관리를 보내 다툼 없이 가까이 지내자는 화친을 제의했고,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귀주 대첩을 큰 승리로 이끈 강감찬은 고려의 안전을 위해 제대로 된 군사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강감찬의 말을 듣고 현종은 개경 주변에 이중으로 나성을 쌓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강감찬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을 것 입니다.

천리장성은 대략 천 리에 달해 천리 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동해안까지 이르는 긴 성입니다.

1리는 약 392m로, 1000리는 대략 392km가 되며, 천리장성을 쌓는데 무려 12년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렸답니다.


마침내 천리 장성이 완성되자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었고, 북방 민족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강감찬은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이 지팡이까지 하사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1032년 덕종 원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습니다. 

강감찬이 죽자 덕종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게 했습니다.

다음은 강민첨 장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강민첨의 본관은 진주,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가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쟁에서 공을 통하여 입신하였습니다. 

1012년 현종 3년, 5월에 동여진이 영일, 청하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의 문연, 이인택, 조자기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을 독려하여 격퇴하였습니다.

1016년에 내사사인이 되었으며,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적을 대파하였습니다. 


강민첨 장군은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고, 그 다음 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습니다. 


강민첨이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강민첨의 공로로 아들 강단에게도 녹봉을 받는 벼슬, 녹자(祿資)를 가하였습니다.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습니다.


강민첨은 원래 서생(書生)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으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승진한 셈입니다. 

문종이 즉위하자 강민첨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북송 대중상부 11년, 1018년 거란이 무단히 침입했을 때,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강민첨이 힘껏 싸워 반령의 들에서 크게 승리했다. 거란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힐 지경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1만 명을 사로잡거나 목베었다. 그 전공을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표창을 함이 마땅하거니와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라.”


강민첨은 2차 거란전쟁 1010년 서경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1010년 11월 25일에서 30일까지 기간인데 강민첨 장군은 동북면의 애수진장이었습니다.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패하자 동북계의 군대가 서경으로 전환 배치될 때 같이 서경으로 이동했습니다. 


서경부유수 원종석이 항복하려는 매국노 짓을 했으나, 조자기가 문을 열었고, 동북면 군사들이 성으로 들어가 그를 처단하고 서경성을 걸어 잠궜습니다.

12월 1일, 항복한 서경을 접수하러 온 거란 선봉대를 동북면 군사들이 패퇴시키자, 거란 요나라 성종은 거짓항복에 분노하여 전군을 이끌고 남하했습니다.

12월 8일, 9일, 동북면 군사는 서경성의 포위를 막고자 나아가 싸웠으나, 중랑장 지채문 장문과 돌격대가 유인책에 당하자, 성에 들어와 성문을 잠그고 수성전에 돌입했습니다.


12월 13일, 거란군의 공성전에 성이 위태롭자,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이 대도수를 속여 희생양 삼고 도주했습니다. 

이에 서경성은 지휘부와 주력군이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12월 15일, 강민첨 장군을 비롯해 통군녹사 조원, 낭장 홍협, 방휴 등이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고, "태조 왕건의 사당에 점을 쳐보니 길한 점괘를 얻었다"며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고, 서경성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강민첨 장군의 결사항전에 12월 17일, 거란 성종은 서경성의 포위를 풀고 떠났습니다.


이제 강민첨 장군의 3차 거란전쟁에서 활약상입니다.

강민첨은 1012년 5월, 청하현, 영일현, 장기현에 쳐들어온 동여진 해적의 침입을 도부서 문연, 감찰어사 이인택, 전중시어사 조자기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을 독려하여 격퇴하였습니다.


1016년, 고려 현종이 아버지 안종을 기리기 위해 강민첨에게 홍경사 건설의 총감독을 맡겼으나, 제3차 여요전쟁이 끝난 뒤에야 본격 건설해 1021년 생전에 완공했습니다. 

강민첨은 1018년 10월 19일, 제3차 거란전쟁에서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의 도통사, 상원수 강감찬 다음 가는 대장군 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강민첨 장군은 12월 10일, 삼교천 전투에서 수공을 가한 뒤 매복기병 1만 2000명을 돌격시켜 크게 거란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12월 말, 곧장 남하하는 거란군을 추격해 자산에서 요격해 크게 패퇴시켰습니다.

강민첨 장군은 1019년 1월 23일, 연주와 위주에서 청천강을 건너 돌아가려는 거란군을 요격해 500급을 베었습니다.

강민첨 장군은 2월 1일, 귀주 대첩에서 북을 치며 힘써 돌격했으며, 거란군이 패퇴해 도주하자 반령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며, 창과 갑옷을 버리고 도주하는 거란군을 추격해 1만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했습니다. 


3월 7일, 고려 현종이 응양상장군 주국으로 임명했습니다. 

은렬사의 묘비에 따르면 이 때 은청흥록대부에 봉해졌으며, 천수현 개국남에 녹훈되어 식읍 300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1020년 4월 19일, 고려 현종이 왕자 왕흠을 책봉하는 자리에 최사위와 강민첨을 옆에 두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김종현 장군 중심 이야기입니다.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 10만명의 고려 침공 당시 개경 일대를 방어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을 도와 거란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1011년 현종 2년에 감찰어사에 임명되었고, 1019년 강감찬 휘하에서 병마판관으로 개성 수비 임무를 맡았으며, 귀주대첩 이후 예부원외랑과 1031년 덕종 즉위년에 우간의대부, 우산기상시 등을 지냈습니다.

김종현 장군에 대한 본관이나 출생년 및 초기 생애 등은 알 수 없습니다만 무관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3차 거란전쟁에서의 맹활약을 보여주기 전에는 2차 거란전쟁이 끝난 직후인 1011년에 차후 같이 전쟁에 참전하는 박종검과 더불어 감찰어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 밖에 없습니다.


거란 소배압이 이끈 정예군 10만명이 고려를 침공했을 당시 강감찬의 고려군은 흥화진 동쪽 삼교천에서 수공으로 거란군을 크게 격퇴했는데 이것이 삼교천 전투입니다.


그런데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소배압은 큰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란 기병 특유의 우수한 기동력으로 현종을 사로잡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남하했습니다. 

타격을 받아도 과감하게 남하하는 거란군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기병 1만명을 주며 추격을 명령했습니다.

고려를 아예 무너뜨리려는 소배압 휘하의 거란군 정예 기병을 맹추격하는 김종현 장군의 추격전은 마치 영화와 같았습니다.  

개경 근처에 도착한 소배압은 현종의 청야 전술로 유목민족 특유의 현지 조달, 약탈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고려 현종과 개경 백성들의 결사 항전 및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 기병의 추격에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종현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해 개경으로 입성한 후 현종의 명령을 받들어 곧 북진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던 소배압의 거란군 8만명에서 9만명 가량이 있는 귀주성 앞 평원에 도달하니 강감찬의 고려군 20만8300명이 거란군과 뒤엉켜 대규모의 회전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마침 김종현 장군 휘하 기병 1만명은 거란군 등뒤에 포진한 후 즉시 주저하지 않고 거란군에게 기병 돌격하여 팽팽하던 회전의 균형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거란의 정예군은 뒤에서 돌진해 오는 기병에 크게 동요하며 분쇄되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김종현이 뒤늦게 도착한 것이 개경에서 재출발하여 늦어진 것인지, 아니면 귀주를 찾아 오는 길을 잃어 늦게 온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재정비로 늦어졌을 가능성도 있는데 거란 기병을 추격한다고 지친 말들을 잠시 휴식시키는 바람에 늦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과감하게 개경까지 남하하는 소배압도 내려오면서 말들이 죽어나갈 정도였다고 하고, 말들이 지쳐 기동력이 떨어져 패배한 전투들도 역사에 많이 있었을 만큼 기병이 타는 군마의 체력은 전투에서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김종현 장군의 기병은 숙적인 거란군 최정예 기병을 추격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을 세운 김종현 장군은 그 해인 1019년에 예부원외랑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전쟁 전처럼 12년이 지나고서야 덕종이 즉위한 해인 1031년에 우간의대부로 임명된 것에 이어 다음 해인 1032년에는 우산기상시로 임명된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귀주대첩에서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 장군이 문관 출신이지만 김종현 장군은 무예가 깊은 무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귀주대첩에서 결정적인 한 방은 김종현 장군의 기병이라는 점에서 역사 기록에서 김종현 장군이 다소 저평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강민첨 장군의 경우에도 2차 거란전쟁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경을 지켜냈고 3차 거란전쟁에서도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점에서 저평가된 것 같습니다. 


결국 귀주대첩은 70대 나이의 강감찬 장군의 지휘 아해 강민첨 장군과 김종현 장군이 큰 역할을 한 전쟁이라고 생각됩니다.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120년간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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