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 강왕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려사' 최충의 논평
현종은 고려의 제8대 대왕, '고려의 세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묘호는 현종, 시호는 원문대왕이었으며, 휘는 순, 자는 안세였고, 승려 시절의 법명은 선재, 즉위 전 봉호는 대량원군이었습니다.
신라말 고려초기의 난세를 종식시킨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 왕욱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고려 초기 근친혼의 사생아라는 점에서 아주 복잡한 가족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현종은 근친혼이 유행하던 고려 왕실에서 태조의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경종의 부인이자 대종(戴宗) 왕욱(王旭)의 딸 헌정왕후 황보 씨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태조 왕건의 아들에는 왕욱이란 이름의 아들이 두 명이 있었는데 그래서 대종 왕욱과 안종 왕욱으로 구분해 부릅니다.
안종 왕욱은 태조 왕건과 신라 경순왕의 사촌누이인 신성왕후의 아들입니다.
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 왕욱은 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로 안종 왕욱의 이복 형 입니다.
헌정왕후는 안종 왕욱의 이복조카딸입니다.
또한 헌정왕후는 앞서 사촌오빠인 광종의 아들인 경종과 네번째 부인으로 결혼했습니다.
정리하면 헌종왕후의 아버지는 태조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입니다.
현종 어머니 헌정왕후는 원래 사촌오빠 광종 아들 경종과 결혼한 왕비였는데 경종이 죽고 난 후 태조 왕건 아들이자 삼촌 안종 왕욱과 눈이 맞아 현종을 낳은 것입니다.
그 당시 왕은 헌정왕후 남동생 성종이었습니다.
성종은 둘째 누나 헌정왕후가 사통하여 임신한 것을 인정하지 못했는데 이는 헌정왕후가 선왕의 왕비였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누나 임신 소식에 유교적 덕목을 들어 숙부 안종 왕욱을 유배를 보낼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현종의 아버지 안종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는 현종의 어릴 때 사망해 현종은 고아가 됩니다.
다만 성종은 제2 왕비 문화왕후를 통해 현종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왕후의 딸이 나중에 현종의 제2 왕비가 됩니다.
근친혼 때문에 복잡하고 난잡합니다.
현종은 한국사에서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하고 인생사가 드라마틱합니다.
성종은 아들이 없어 사망 후 성종 조카 목종이 즉위합니다. 목종은 경종의 아들입니다.
현정의 사촌 목종이 즉위하면서 목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이모인 현애왕후 즉 천추태후의 독살 시도 등 탄압이 시작됩니다.
천추태후가 현종을 탄압한 것은 목종이 후계자가 없어 목종 사후 유력한 후계자가 현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추태후는 당시 김치양을 총애했고 그 사이에 사생아 아들을 낳아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김치양 사이의 아들은 왕씨가 아닌 다른 성 김씨였기에 왕위에 오르기에는 역성이라 무리가 있었습니다.
다만 목종은 사촌 동생 현종을 후계자로 생각해 두었기 때문에 김치양을 몰아내기 위해 강조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현종은 태어나자마자 암울한 전란의 시대를 살았고, 몇 년 뒤 고아가 되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어떨결에 즉위했습니다.
이후 거란족 요나라의 명군이자 정복군주였던 제6대 황제 성종과 명장이었던 동평군왕 소배압의 두 차례에 걸친 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던 중 참담하고 위급했던 시련들도 있었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면서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고려의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생애 내내 이어졌던 고생 탓인지 40세를 일기로 요절했지만, 재위 기간 동안 나라 안팎의 모든 위난을 평정하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 현종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무려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기나긴 황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현종 이후 고려는 동아시아 3국 고려 거란 북송 간 균형적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습니다.
또한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의 제2의 건국 군주이자 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현종의 부인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제 근친혼의 끝판왕을 보게 됩니다.
현종 부인은 13명 입니다.
그리고 현종은 13명 부인 사이에서 5남 8녀를 얻습니다.
현종은 18살의 나이로 왕에 올랐기 때문에 재위기간은 1009년부터 1031년까지 약 22년으로 긴 편이었습니다.
첫째 왕비 원정왕후 사이에서는 아기가 없었습니다.
원정왕후 본관은 선산으로 6대 국왕인 성종과 제 2 왕비인 문화왕후 김씨 사이에 태어난 딸입니다.
현종 첫째 왕비가 성종의 딸인 것입니다.
문화왕후는 성종의 여동생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가 낳은 목종, 헌정왕후가 낳은 현종을 돌보며 양어머니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원정왕후는 부계로는 현종과 5촌 사이이고, 모계로는 원정왕후의 고모가 현종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4촌 사이가 됩니다.
원정왕후는 현종이 즉위한 1009년 5월 왕비가 됩니다.
원정왕후는 연흥궁주, 현덕왕후로 불렸는데 어머니 문화왕후가 받았던 현덕궁을 물려받아 현덕왕후로 불렸던 것입니다.
현종은 거란의 공격에 강조가 패배하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전남 나주까지 머나먼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피난 도중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신하, 병사, 궁녀 등 마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현종과 원정왕후 그리고 제2 왕비 원화왕후, 원정왕후의 어머니 문화왕후 등 몇 명만 남았습니다.
당시 지방 호족과 관리들은 현종을 무시하고 푸대접을 했습니다.
엄동설한 강추위 속에서 원정왕후는 임신 중이라 이동이 쉽지않아 고향 선산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원정왕후는 임신한 기록은 있는데 출산 기록은 없습니다.
원정왕후도 30대 나이가 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부인은 원화왕후 최씨입니다.
본관은 경주이고 6대 국왕 성종과 그의 제3 왕비인 연창궁부인 최씨 사이에 태어난 딸 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우복야를 지낸 최행언입니다.
어머니는 왕후로 봉작되지 않은 후궁이었으나 성종에게 자녀가 워낙 없고 성인으로 살아남은 자녀가 딸 둘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정왕후에 이어 원화왕후도 현종의 부인이 됐던 것입니다.
현종이 왕이 된 것은 성종의 사위 자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종의 딸인 만큼 왕씨이지만 동성을 피하기 위해 외가 성을 사용해 최씨가 됐다고 합니다.
처음엔 항춘전왕비라 칭했고, 이후 상춘전왕비로 바뀌었고, 이후 대명궁을 받아 대영왕후라 불렸습니다.
원정왕후는 아들 왕수를 낳았으나 봉작 받기 전 사망했고, 효정공주 천수전주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피난 중인 현종을 유일하게 도와준 인물이 공주의 호족 김은부 였습니다.
현종은 피난 당시의 고마움에 김은부의 세 딸을 모두 왕비로 삼았습니다.
세 자매가 모두 현종의 부인이 된 것인데 이러한 자매가 왕비가 된 사례를 태조 왕건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태조의 경우는 두 호족 가문의 자매가 각각 왕비가 된 바 있습니다.
현종의 피난 시절에 왕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거란에 넘기려는 반란의 위기가 있었는데 이를 모두 진압한 인물이 호위무사 지채문 장군이었습니다.
김은부의 장녀 원성왕후 김씨가 중요 인물입니다.
현종은 원성왕후 사이에서 다음왕인 덕종과 정종을 얻습니다.
원성왕후 본관은 안산이며, 김은부와 안산군대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3명의 딸 중 장녀입니다.
원성왕후 외할아버지는 이허겸으로 이후 고려 전기 대표적인 외척이 되는 인주 이씨 가문입니다.
김은부는 공주 절도사였던 당시 현종이 피난 후 돌아가는 길에 공주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원성왕후에게 현정의 옷을 지어 바치게 했습니다.
원성왕후는 이 때 인연으로 1011년 현종의 부인이 되고, 1013년 장남 덕종을 낳은 후 관저 연경원을 하사 받아 연경원주가 됐습니다.
이어 원성왕후는 1018년에는 차남 정종을 낳으며 연경원이 연경궁이 됐고 연경궁주가 됐습니다.
왕의 부인이 되면 아들을 낳아야 승진을 하나 봅니다.
덕종은 1022년 태자로 책봉되고 원성왕후는 정식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여동생 원혜왕후가 2남 1녀를 남기고 사망합니다.
원성왕후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두 아들 모두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다만 고려 9대 왕 덕종은 현종 사망 후 17살의 나이로 즉위하지만 3년 만에 사망해 동생 정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종도 28세 나이로 사망해 이복동생이자 이종사촌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문종은 원정왕후 여동생 원혜왕후의 아들입니다.
현종과 원성왕후의 장녀 인평왕후는 11대 국왕 문종의 제 1 왕비가 됩니다.
인평왕후는 문종의 이복남매이자 외사촌 관계입니다.
원성왕후와 함께 여동생 원혜왕후는 함께 입궁을 했습니다.
원혜왕후는 안복궁주가 됐다가 1025년 왕비가 됐고 평경왕후라 했습니다.
아들 문종 왕후가 즉위하자 태후로 추존 했습니다.
원혜왕후의 차남은 정간왕 왕기인데 1061년 평양공 추대 사건으로 유배를 가서 사망합니다.
원혜왕후의 장녀 효사왕후 김씨는 이복남매이자 이종사촌 덕종의 왕비가 됩니다.
결국 원성왕후 자녀들과 원혜왕후 자녀들은 교환 결혼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자매가 현종과 함께 결혼해 부인이 되고 거기서 태어난 자녀는 또 서로 교차해 결혼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김은부의 셋째 딸은 원평왕후입니다.
언니 원성왕후 원혜왕후에 이어 현종과 결혼했습니다.
원평왕후는 1022년 원혜왕후가 사망하자 그 다음에 입궁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종의 제7 부인이 된 것은 원평왕후가 나이가 어려 뒤늦게 입궁한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원평왕후는 현종과 사이에 딸 효경공주 하나를 낳았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근친혼이 이복남매 이종사촌 사이에도 흔한 일이라는 점에서 난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외에도 원용왕후 유씨가 현종의 부인입니다.
원용왕후는 본관은 정주이며 아버지는 경장태자입니다.
원용왕후는 왕씨인데 동성을 피하기 위해 친할머니 선의왕후 유씨 성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장경태자는 추존왕 대종 왕욱의 아들입니다.
또 현종 부인으로 원목왕후 서씨가 있습니다.
원목왕후는 본관은 이천이며 삼중대광내사령 서눌과 이천군대부인 최씨 사이에 태어난 딸 입니다.
원목왕후 할아버지는 거란과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 이고 당시 고려 배향공신 명문가 집안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서필, 할아버지 서희 그리고 아버지 서눌 3대가 모두 배향공신인데 배향공신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이며 사당인 종묘에 모시게 됩니다.
현종의 제8 부인은 원순숙비 김씨입니다.
본관은 경두이며 평장사를 지낸 김인위 딸 입니다.
원순숙비는 집안이 신라 왕족 출신인데 38대 국왕 원성왕의 현손으로 명문가 입니다.
원순숙비의 여동생은 계림국대부인이며 남편이 이자연 입니다.
문종의 왕비, 후궁 등 3명이 계림국대부인 김씨의 딸 입니다.
남동생 김원충의 딸들은 각각 정종의 후궁 용절덕비, 문종의 후궁 인목덕비 입니다.
또 다른 남동생 김원정의 딸은 서희 차남 서유결의 아들 서정과 결혼했습니다.
막내 남동생 김원황의 딸은 숙종의 유일한 왕비 명의왕후 유씨의 어머니 낙랑국대부인 김씨 입니다.
이밖에도 현종 부인으로는 제 9 부인 원질귀비 왕씨, 제 10대 부인 귀비 유씨가 있고 이어 11대 부인 궁인 한씨, 12대 부인 궁인 이씨, 13대 부인 궁인 박씨가 있습니다.
이들도 나름 관직을 가진 가문의 딸들이었습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배우 이시아가 원정왕후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시아는 단아하고 깔끔한 이미지여서 젊은 왕비로 잘 어울린다는 평가입니다.
원성왕후 사이에서 현종 다음의 왕인 덕종과 정종을 얻는다.
원성왕후 역할에는 아역배우 출신 하승리가 맡습니다.
하승리는 청춘의덫에서 심은하의 딸로 데뷔했고 뽀뽀뽀, 딩동댕 유치원 등을 거치며 아역스타로 활동했고 2022년에는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고려거란전쟁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현종과 관련한 부인들이 모두 나오지는 않지만 배경을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을 듯 합니다.
고려 초기에 근친혼이 성행한 것은 왕권 안정 및 강화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당시 지방 호족이 강했던 터라 호족과 정략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현종은 근친혼이 가장 성행한 시기를 보냈고 여기서 태어난 아들 3명이 왕이 됐습니다.
그리고 현종의 자녀들이 고려 가문과 역사를 이끈 중흥세력이 됐습니다.